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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49년 봉축특집]기고/부처님 오신뜻은… <불교신문>

글쓴이 : 한보광 날짜 : 2005-07-26 (화) 08:25 조회 : 6878
[불기2549년 봉축특집]기고/부처님 오신뜻은…
 
“자유.평등.평화 구현 위해 오셨다”

보광스님(동국대 교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봉축의 물결이 가득하다. 오월의 신록은 아름다우며, 거리마다 연등을 밝히고, 갖가지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불자로서 일년 중 가장 바쁜 날이며, 기쁜 날이다. 더구나 공휴일이 되어 전 국민의 축제일로 된지도 오래 되었다. 저마다 소원을 기원하고, 원력을 세우며, 부처님오신날의 참된 뜻을 기리기 위해 정진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부처님오신날을 가장 보람지게 맞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불자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을까? 즉 여래출현의(如來出現意)는 무엇일까라고 하는 문제는 바로 불교의 근원적인 명제이기도 하다. 이는 중국 선불교에서 말하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와 다름이 없다. 즉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질문이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뜻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말이다. 여래출현의 참 뜻이나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선사들은 이 화두를 가지고 평생을 정진하였으며, 일생을 바쳤다.

부처님 오신 뜻은 무엇일까? 도저히 쉽게 해결 될 수 있는 답이 아니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의 장면에 대해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大正藏, 3, 463, 下)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사월 칠일 마야부인이 밖으로 나가서 민가의 나무 아래를 지나 갈 때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었다. 샛별이 떠오를 때 마야부인은 나무 가지를 잡고 있었는데, 오른 쪽 옆구리로 태어나서 일곱 발을 걸으시고 손을 들면서 말씀하시기를 ‘천상천하에 오직 나가 존귀하네. 삼계가 모두 괴로움이니 마땅히 내가 편안하게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爲尊 三界皆苦 吾當安之)”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大正藏, 3, 473, 下)에서는 “4월8일 샛별이 떠오를 때 오른 쪽 옆구리로 태어나서 일곱 발을 걸으시고, 오른손을 들면서 말씀하시기를 ‘천상천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네, 삼계가 모두 괴로움이니 어찌 즐거움이 있으리요’(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何可樂者)”라고 하였다. 이상의 두 경전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대동소이하다. 여기서 부처님의 탄생시간은 샛별이 뜰 때였던 것 같다. 즉 새벽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삼계가 괴로움뿐이지만 내가 안락케 하리라는 뜻이고, 후자는 삼계가 괴로움뿐이니 어찌 즐거움이 있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고통의 문제, 괴로움의 문제를 부처님은 해결했기 때문에 천상천하에서 둘도 없는 존재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위의 두 경전의 내용을 합해보면 바로 안락(安樂)이 된다.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뜻은 바로 괴로움을 해결하여 안락(安樂)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모든 중생이 고통을 벗어나 안락의 세계에 들기를 바라기 위함이다. 이것을 가지고 중생구제라고 한다. 바로 부처님은 사바세계의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이를 제도(濟度)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사명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중생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 고통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가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출가의 원인이기도 하다.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여 수행하였으며, 이를 해결하신 것이다. 생의 고통은 윤회를 벗어남으로써 가능하였으며, 다시는 업력에 의한 생을 받지 않게 되었다. 즉 업생(業生)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보살의 원력에 의한 원생(願生)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늙고 병드는 문제는 인간의 욕망을 줄이고 절제된 생활을 함으로서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었다. 육신을 잘 관리하면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죽음에 대한 고통은 누구도 참기 어려우며,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가장 큰 문제로 삼았던 것은 죽음의 문제였다. 태어남이 마음대로 되지 않듯이 죽음도 자신의 의지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시기 전에 네 문을 나가서 노병사(老病死)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 중에서 죽음의 문제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행정진하였다. 현실을 고통으로 파악하고 난 뒤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게 되었다. 그 이유는 중생의 생로병사에 대한 집착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에서 일어나는 무명의 집착은 끊임없이 괴롭히게 되어 있다. 특히 생에 대한 애착은 죽음을 거부하게 되어 있다. 이를 면밀히 관찰해 보니 어리석음이 원인이다. 그러면 어리석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더욱 깊은 정진에 들어간 싣달타는 마음이 점점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하지 못하였던 목욕도 하고, 영양도 섭취한 후 다시 고요한 선정에 들었다. 깊은 멸도에 들어가 최상의 즐거움을 성취하게 되었다. 바로 12월 8일 샛별을 보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즉 연기법(緣起法)을 깨달은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법을 깨달으면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간파하신 것이다. 그래서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보며, 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하셨다. 즉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를 성취하신 것이다. 고타마 싣달타태자가 비로소 석가모니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이제부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다. 지금까지는 업력에 의한 삶과 생을 받았으나, 열반을 성취하신 후부터는 윤회를 벗어나 삼계의 고해를 건너게 되었다. 업의 원리가 아닌 원력(願力)의 삶을 성취하게 되었다. 이를 깨닫고 보니 나와 남을 구분할 것조차도 없는 무아(無我)의 원리를 발견하신 것이다. 열반을 성취하시기 전까지는 각자의 업력에 의해 존재하므로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깨달음을 얻은 후부터는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중생구제의 원력(願力)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부처님은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대자유를 성취하신 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건만, 법에 어긋나지 않고, 모든 것이 진리 아님이 없었다. 따라서 부처님과 법은 둘일 수 없게 되었다.

깨닫고 보니 이를 볼 수 있는 성품도 누구나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성품을 불성(佛性)이라고도 하며, 자성(自性)이라고도 한다. 사람과 부처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에게 평등한 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중생계는 천차만별의 차별이 있고, 계급이 있다. 그러나 연기법은 모두에게 평등한 법이며,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원리임을 알고 감탄하였다. 또한 모든 중생들에게도 자신과 똑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청정한 본래의 자성은 부처와 조금도 다름없건만, 생사윤회를 거듭함으로서 어두움에 싸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가련히 여기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상구보리(上求菩提)의 구도였지만, 이제부터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실천을 위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 중생제도의 원력을 세운 부처님은 다섯 제자를 찾아가서 초전법륜을 펴게 된 것이다. 이 때 설하신 내용이 바로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이며, 초기불교의 근본원리가 된 것이다. 비로소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단인 삼보(三寶)가 이루어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화합할 것을 수없이 강조하셨다. 승단은 신앙과 수행을 함께 하는 신행공동체이다. 무엇보다 승단의 생명은 화합과 평화에 있다. 여기서 불보(佛寶)란 부처님이며, 윤회를 벗어나 대자유를 성취하신 분이다. 다음으로 법보(法寶)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누구에게나 평등한 원리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다. 또한 승보(僧寶)란 화합중(和合衆)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승보의 핵심은 화합하고 평화스러운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여 보배로이 여기는 삼보 중 불보는 자유이고, 법보는 평등이며, 승보는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사회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자유와 평등과 평화라고 말하고 싶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오신 부처님의 뜻은 무엇일까? 인류에게 보내는 부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중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라고 했을 때 이 원리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즉 부처님은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위해 오시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세운 원력이 바로 사홍서원(四弘誓願)이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라고 하는 실천 없이는 인류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올 수 없을 것이다. 중생이 존재하는 한 보살의 사홍서원도 실천될 것이다. 괴로움에 신음하는 중생이 존재하고, 갈등과 경쟁으로 치닫는 생존경쟁이 존재하며, 서로 다른 이념으로 대립되고, 미망에서 허덕이는 이상 진정한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원리란 인간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과 세계의 평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현대인류사회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은 어떻게 하면 자유를 누리고, 빈부귀천 인종 종교 지역 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나눌 수 있으며, 전쟁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라고 하는 문제가 최대의 관건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류뿐만 아니라 미물곤충이나 유정물 무정물을 막론하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자유와 평등과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설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해야하고, 동물과 인간이 함께 했을 때 진정한 불국토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날이 하루 속히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홍서원을 실천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부처님 오신 뜻은 무엇일까? 이는 바로 자유와 평등과 평화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닐까.



[불교신문 2130호/ 5월17일자]
2005-05-14 오전 11:20:38 등록
http://www.buddhistnews.net/news/1_152/200505141116069921.asp